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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군사법정에 선 박정희 소령, 실록 군인 박정희

by 길찾기91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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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법정에 선 박정희 소령

 

194928일 구 통위부(미군정 당시 국방부에 해당하는 부서로, 위치는 현재의 서울 충무로 코리아헤럴드 뒤편 인근) 건물 장교식당에 임시로 군사법정이 마련됐다. 재판장은 김완룡(예비역 소장, 육군 법무감) 중령이 맡았고, 심판관으로 김대현 중령 등 3, 검찰관 신모(6 -25 때 전사) 중위, 관선변호인으로 최영희 (6·25 때 전사) 중위 등이 참석했다. 또 피의자들의 조서 작성을 맡았던 방첩대 소속 이한진 대위가 배석했다.

 

바로 이 군사법정 (1)에 당시 육군본부 소속 박정희 소령이 피고인 신분으로 섰다. '문건'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 날 이발을 새로 하고 머릿기름을 많이 발라서 유난히 번득였다. 복장은 당시로선 예복인 진한 구레바인 정복차림이었다. 그는 재판장의 신문에 순순히 피의사실을 자백하고 또 시인했다. 이 날 법정에서 그는 국방경비법 제18, 33조 위반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 판결로 그는 현역 소령에서 파면됐고, 급료도 몰수당했다.

 

그와 같이 재판을 받았던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 조모 대위 등은 사형 구형에, 사형 언도를 받고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박정희와 만주 군관학교 또는 일본 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최남근은 봉천군관학교 5기생 출신이며, 오일균은 일본 육사 61기 출신이었다. 또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1년 선배이자 3공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이주일은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나 무죄 판결로 풀려났다. 이주일은 박정희의 권유로 군 입대 전에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또 박정희의 주선으로 군에 입대한 것으로 ''에 나와 있다.

 

박정희는 집권 후 자신의 군사재판 관련자료를 모두 폐기토록 지시한 바 있다고 한 인사는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공문서 형태로 된 박정희 관련자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는 실정이다. 다행히 필자는 지난 97년 모 기관에서 박정희가 좌익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후 최종적으로 어떤 조치를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공문서 하나를 입수할 수 있었다. 1949418일자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육군본부 총참모장 이응준 소장의 명의로 발령된 이 명령서는 숙군 때 군사재판에서 1심 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이른바 '지휘관 확인', 즉 재심을 거쳐 형량이 재조정된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박정희도 이 가운데 포함돼 있다.

 

국방부 특명 제5(19481220일부)에 근거해 용산 육군본부에 마련된 법정(재심)에서는 박정희 등 69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들의 죄과는 국방경비법 16조 위반, '반란기도죄' 였다. 이들 중 영관장교는 그를 포함해 소령이 3, 대개는 위관장교이며, 하사관도 10여 명 포함돼 있다. 이들의 구체적인 범죄 사실로는 전 피고인은 단기 4279(1946) 7월경부터 4281(1948)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 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 했다는 것. 이들 가운데 박정희의 죄과는 구 경비법 32조 위반, 범죄사실은 '군 병력 제공죄' 로 적시돼 있다.

 

명령서에 따르면, 전체 69명 가운데 정진 등 4명은 무죄 판정(한동석은 징역형에 한하여 집행정지)을 받았으나 나머지 66명은 유죄 판정을 받았다. 대상자 대다수는 여기서 감형 조치를 받았다. 즉 징역 15년은 10년으로, 징역 10년은 5년으로, 또 징역 5년은 징역 1년으로 각각 감형되거나 혹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도 했다. 박정희의 경우 1심 판결에서 파면, 급료몰수, 징역무기"를 선고받았으나 '심사장관의 조치' 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고, 그리고 다시 '확인장관의 조치' 에서 확인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들 중 유일하게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집행정지로 풀려난 것이다. 재심의 최대 수혜자였던 셈이다. 당시 '확인장관'은 육군의 최고 책임자인 이응준 총참모장으로, 그는 일제하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이었다.

 

박정희와 함께 '재심'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신경군관학교 후배인 황택림(5기생, 본과는 일본육사 59기 졸업) 대위도 포함돼 있다. 황은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으며, 다시 확인장관 조치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다.

 

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이후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배려로 육본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6 · 25 발발 5일 뒤인 630일자로 현역에 복귀했다. 그는 이로써 '좌익 악령'을 공식적으로 떨쳐버리게 됐다.

 

<실록 군인 박정희> 정운현, 개마고원, 2004. 14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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