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궁금증을 갖고 지내던 차에 읽은 책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더라.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의 상황이나 의식이 그 정도까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또 얼마나 달라졌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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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난민제도를 갖기 전, 우리나라에는 베트남 보트피플 난민들이 찾아왔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과 공산주의 북베트남 사이에서 벌어진 15년간의 제2차 베트남전쟁이 1975년 4월 30일 싸이공 함락과 함께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생산수단의 국유화, 집단화, 경제활동 통제, 사상교육 등 사회주의 정책이 실시되자, 남베트남을 지지하던 수십만 사람들은 보트를 타고 남중국해로 탈출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들의 상륙을 거부하거나 강제송환하여 난민문제가 국제적으로 대두되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은 남베트남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교민 철수를 위해 해군 수송선 2척을 파견하고, 1975년 4월 26일 1,335명의 피난민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한국교민 외에도 한국과 인연이 있던 베트남인 910명, 중국인 31명, 필리핀인 1명이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이어 한국선적 화물선이 베트남 인근 해상에서 216명의 난민을 구제해 부산항에 입항했으며, 1975년 한해 동안 국내 출생 신생아를 포함해 총 1,562명의 피난민이 부산 임시수용소에 입소했다.
그런데 1975년부터 89년까지 국내에 입국한 2,944명의 베트남 보트피플 가운데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정착할 수 있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들은 모두 연고를 찾아 국외로 이주했고, 연고가 없는 27세대 49명에게는 국내거주가 허용되었으나 모두 무국적자가 되었다. 이들은 우리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더구나 1977년부터 89년까지 국내에 입국해 부산 재송동 월남난민구호소에 수용되었던 1,382명의 베트남민에게는 1개월마다 갱신되는 재난상륙 허가만을 허용할 뿐, 아무리 오래 수용되어도 별도의 체류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단 한 명에게도 국내 정착을 허용하지 않고 전원을 제3국으로 송출한, 국제적으로 유례가 드문 사례로 기록되었다.
여기가 당신의 피난처입니다, 이호택 조명숙, 창비, 2010.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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