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대한 논의가 길어지고 있다.
사실은 논의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없애고픈 측과 진행하려는 측의 치열함이 보인다.
의회 정치가 대화와 타협을 전제로 한 것인데 현재는 대화가 안보인다.
대화 의지가 없는 측이 하나라도 있으면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니.
어떤 이들은 정치가 너무 시끄럽다고 모두를 싸잡아 비난한다.
시끄러운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러는거라면 이해할 만하다만 그게 아니라 전후맥락을 잘 살펴보지는 않은 채 그냥 현상을 가지고 말하면 그건 의도하지 않는 왜곡이 된다.
매우 고상한 척 하지만 어쩌면 그건 무식이다.
공수처든 다른 의제든 논의없이 진행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대화의 문이 닫혔을 때는 돌파밖에 방법이 없을 터.
우리 국민들은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크게 떨쳐 일어나는 성향이 있으니 항상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능력으로 보이는 것도 용서 안하더라.
정치인과 관료에 대한 생각이 요즘 많다.
그저 시민으로 밖에서 살펴볼 뿐인 필부의 입장이지만 지금의 상황이 너무 답답하다.
그래도 무식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으로 자꾸 살펴보는 중이다.
대간의 역할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감찰과 탄핵, 정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고,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 두 언관(言官)의 관원을 대간(臺諫)이라 불렀다. 대간은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
대간이 되려면 가문도 좋아야 했고, 20~30대에 문과에 급제해야 함은 물론 강직한 성격을 지녀야 했다. 정치의 잘못과 부정부패를 엄하고 매섭게 탄핵하려면 단단한 실력과 청렴한 성품도 필요했다. 대간은 목숨을 잃더라도 직언할 수 있어야 했다. 뇌물을 받거나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증식해서는 안 되었고, 친인척이 함께 대간에 있어도 안 되었다.
대간에게는 새 법을 만들 때와 신규 인사가 있을 때 이를 심의할 권한인 서경권(署經權)이라는 것이 있었다. 법을 만들 때 이를 심사하는 일은 입법의 타당성을 감시하는 것이고, 인사에 신원을 조회하는 일은 공정한 인사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대간은 50일 이내에 가부를 판정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국왕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대간의 서경은 5품 이하에 대해서만 이루어졌고 부(父),모(母), 처(妻)의 4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심사 범위에 속했다. 임명이 부당하면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써서 돌려보냈다. 대간은 국왕의 관교(官敎)만으로 임명되는 4품 이상에 대해서도 탄핵을 통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때도 국왕과 대립하기 마련이었다.
대간에게 탄핵받은 관료는 즉각 사표를 내고 물러나야 했다. 그 다음 제3의 사찰 기관에서 조사해 대간이 옳으면 탄핵받은 사람이 물러나고, 그르면 대간이 물러났다.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대간은 피혐(避嫌: 혐의를 피해 물러나 있음)해야 했고, 제3의 사찰 기관에서 판결을 한 후에야 집무 여부가 결정되었다.
사헌부에서는 대관과 감찰(監察)이 구분되었다. 대관에 해당되는 대사헌, 집의, 장령, 지평은 언론을 담당하고, 감찰은 실제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감찰은 총 24명으로 구성되었고, 별청에 감찰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감찰은 관원의 불법 행위. 각종 집회, 제사, 조회, 과거 시험장 등에서 행해지는 부정을 감찰했다. 따라서 외근이 많았으며, 아침에 출근하면 지평이 업무를 분담시켰다. 감찰이 입회해야 하는 행사는 법률로 지정되어 있었으며, 주관 관청은 수일 전에 공문을 보내 행사 사실을 사헌부에 통지했다.
감찰은 회계 부서에 주로 배치되었는데, 입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출납을 주도했다. 그러다 보니 공금 횡령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한 감찰에게 6개월간 특정 관청의 전곡 출납을 맡기는 월령감찰(月令監察) 제도를 폐지하고 매일 담당 감찰을 바꾸는 매일분대(每日分臺)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전문성이 떨어지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제대로 감독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지방에는 행대(行臺)를 파견했으며, 사행(使行)에도 따라갔다. 이렇게 할 일이 많다 보니 감찰은 구조 조정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사법부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국가의 범죄는 대간이 사건화하면 의금부에서 심문하고 국왕이 참석한 중신 회의에서 형량을 정했다. 비리나 범죄를 논죄해 형량을 정하는 업무를 맡았던 점에서 대간은 현대의 검찰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대간은 국가의 이념 지향점을 중시하고 이에 반하는 정책이나 조치에 반대했다. 유교 국가의 틀을 세우고 왕권을 보호하며 양반 관료의 이익을 보장하는 언론을 폈다. 즉 불교나 도교 같은 이단을 배척하고,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양반 관료 정치의 수호자였다. 관료의 실정법 위반 사실뿐 아니라 도덕적 결함도 비판했다. 아울러 왕권의 전제화와 특정 관료의 독재화도 억제했다.
조선왕조실록2, 이성무, 살림. 2015. 13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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