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니와 럼즈펠드 : 최초의 재난 자본주의자들
언론에 잊힌 럼즈펠드 연설의 중심 사상은 바로 부시 체제의 핵심 강령이기도 했다. 즉 정부의 업무는 통치가 아니라 통치 업무를 더 효율적이면서 뛰어난 사기업에 아웃소싱하는 일이었다. 럼즈펠드가 분명히 밝혔듯, 예산조정 같은 만만한 일은 물론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의 주창자들에겐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만큼이나 세계를 바꿀 움직임이었다.
부시팀이 정권을 잡을 무렵, 1980~1990년대 민영화 지지자들(연방정부 및 주정부는 물론 클린턴 행정부가 수용했던 사람들이다)은 대규모 공기업을 매각하거나 아웃소싱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수도, 전기, 고속도로 관리, 쓰레기 수거 등의 분야다. 이런 부서들이 잘려나가자 국가는 핵심 분야만 남게 되었다. 즉 정부의 고유기능에 해당하므로 사기업에 맡겼다가는 국가 위기가 올 수 있는 분야다. 군대, 경찰, 소방서, 감옥, 국경통제, 정보부, 질병통제, 공립학교 시스템, 정부 관료 관리가 그에 해당한다. 민영화 물결은 기업들에 많은 이윤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국가의 일부 기능을 담당했던 기업들은 단번에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정부의 핵심 기능에도 탐욕스러운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1990년대 무렵, 핵심 기능은 민영화 대상이 아니라는 금기를 깨뜨리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여러 면에서 봤을 때, 그것은 현상 유지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의 석유매장지, 남미의 텔레콤, 아시아의 산업은 1990년대 주식시장에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러한 경제적 역할을 미국 정부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요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개도국 사이에 민영화와 자유무역에 대한 반발이 급격하게 퍼지는 바람에, 성장의 또 다른 수입원이 차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쇼크 독트린을 자기중심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이제껏 재난과 위기는 급격한 민영화계획을 추진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재난을 창출하거나 그에 대처하는 힘을 가진 군대, CIA, 적십자사, 유엔, 재난 '응급대처’ 기관들은 공공부문의 마지막 보루였다. 기업들은 이런 핵심 분야를 먹어치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연마해온 위기 이용방식을 지렛대로 삼아 민영화를 시도하려 했다. 한마디로 프리드먼 위기 이론의 최첨단 버전이라 하겠다.
이른바 민영화된 경찰국가를 만들려는 선발대는 부시 행정부의 요직에서 일했다. 딕 체니, 도널드 럼즈펠드, 조지 W. 부시가 바로 그들이다.
시장 논리를 미군에 적용하려는 럼즈펠드의 아이디어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초반, 그가 시카고 경제학부 세미나에 참석하던 때부터다. 그는 특히 밀턴 프리드먼과 절친한 사이였다. 럼즈펠드는 서른 살의 나이에 의회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프리드먼은 조숙한 공화당원인 그를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럼즈펠드가 대담한 자유시장 정강을 만드는 걸 도와주고 경제학 이론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수년 동안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럼즈펠드는 매년 헤리티지 재단의 총재 에드윈 퓰너(Edwin Feulner)가 주최하는 프리드먼의 생일파티에 참가했다. 프리드먼이 아흔이 되었을 때, 럼즈펠드는 정신적 스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밀턴의 주위에 있거나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 자신이 훨씬 더 똑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럼즈펠드와 프리드먼은 서로를 존경했다. 프리드먼은 시장을 탈규제화하려는 럼즈펠드의 의지에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1980년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를 조지 부시가 아닌 럼즈펠드로 지명하라고 레이건에게 강력하게 로비했다. 레이건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리드먼은 그러한 행동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프리드먼의 비망록에 따르면, “레이건은 조지 H. W. 부시를 부통령 후보자로 선택했다.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대통령직뿐만 아니라 캠페인 자체가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선호한 후보자는 도널드 럼즈펠드다. 그를 선택했다면 레이건은 대통령으로서 성공했을 것이다. 또한 유감스런 부시 시대와 클린턴 시대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럼즈펠드는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진 못했지만, 급성장하는 비즈니스 분야에서 경력을 쌓으며 이를 극복해냈다. 그는 국제 제약회사 서얼(Searle)에서 CEO로 일하며, 정치 인맥을 활용해 아스파탐(aspartaime: 인공 감미료로 쓰이는 저칼로리 단백질로, 발암논란이 있음 - 옮긴이)의 미국식품의약국(FDA) 허가를 얻어냈다. 흔히 새로운 감미료로 선전되는 제품이다. 이 제품은 상당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높은 이윤을 얻었다. 그는 또한 몬산토가 서얼을 매입하도록 중개한 대가로 1,200만 달러의 개인이득을 취했다.
럼즈펠드는 큰 거래를 성사시킨 덕분에 재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시어스(Sears)와 켈로그(Kellogg's) 같은 대기업의 이사로 취임했다. 한편 아이젠하워가 군산복합체라고 불렀던 회사들은 전직 국방부 장관 출신인 그를 높게 평가했다. 항공기 제조업체 걸프스트림(Gulfstream)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스위스의 거물급 엔지니어링 회사인 ABB의 이사회에 있으면서 연봉 19만 달러를 받았다. 북한에 플루토늄 생산기술을 포함해 핵기술을 판 사실이 드러나 뜻하지 않게 주목을 받았던 회사다. 원자로를 판매한 2000년 당시, 럼즈펠드는 ABB 이사회에서 유일한 북미인이었다. 그는 원자로 판매가 이사회에서 다루어진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회사는 “이사들에게 분명히 알렸다.”라고 밝혔다.
그는 1997년 바이오테크 회사인 질리드 사이언시스(Gilead Sciences)의 이사장이 되었을 때, 최초의 재난 자본주의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철저하게 확립했다. 이 회사는 인플루엔자 치료제이자 조류독감에 쓰는 약품인 타미플루(Tamiflu)에 대해 특허를 신청했다. 따라서 상당한 전염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발생한다면(또는 그러한 위협이 있다면), 정부는 질리드 사이언시스로부터 수십만 달러의 치료제들을 사야만 한다.
대중건강을 위협하는 비상질병의 치료제 및 백신에 특허를 내주는 것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여전하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전염병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소아마비 발병이 절정에 이른 적이 있었을 때, 질병을 통해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이 윤리에 맞는지에 대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소아마비 발생은 거의 6만 건에 달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사지가 마비되거나 심지어 죽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따라서 치료제를 찾으려는 노력은거의 광적이었다. 마침내 피츠버그 대학의 과학자 조나스 소크(Jonas Salk)가 치료제를 찾아냈다. 1952년에 첫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것이다. 그는 생명을 구한 그 치료제에 대해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특허는 없습니다.” 소크는 방송인 에드워드 머로(Edward R. Murrow)에게 말했다. “당신은 태양을 특허 낼 수 있습니까?”
만약 태양도 특허 대상이라면 도널드 럼즈펠드가 이미 오래전에 미국 특허상표국에 신청을 해놨을 것이다. 그가 몸담았던 질리드 사이언시스는 네 가지 에이즈 치료제에 대해서도 특허권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는 개도국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할 저렴하고 대중적인 치료제가 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어, 미국 공중보건운동가들의 비난 대상이 되어왔다. 운동가들은 질리드의 주요약품이 납세자들이 내는 후원금으로 개발되었다고 지적했다. 질리드 입장에선, 역병은 성장하는 시장이다. 때문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타미플루를 비축해놓으라며 사업체와 개인들에게 공격적 마케팅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럼즈펠드는 정부에 재입성하기 전에 고수익의 새로운 비즈니스에 매료되었으며 성장 가능성을 확신했다. 그래서 바이오테크와 제약회사에 집중 투자하는 펀드들의 설립을 도왔다. 모두 질병이 만연하는 재난 같은 미래에 의지하는 회사들이다. 이제 각국 정부들은 사기업이 특허를 통해 독점하고 있는 생명을 구할 약품들을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할 판이다.
딕 체니는 포드 행정부에서 럼즈펠드의 피보호자였다. 그 역시 암담한 미래가 주는 수익성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럼즈펠드가 역병을 통해 호황의 시장을 봤다면, 체니는 전쟁의 미래를 바탕으로 해서 돈을 벌었다. 체니는 군대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민간 계약업자에게 맡기는 비중은 대폭 높였다. 그는 휴스턴 소재의 핼리버튼 계열사인 브라운앤드루트(Brown&Root)와 계약을 맺었다. 미군의 업무 가운데 민간분야가 대신 맡아 이윤을 낼 수 있는 업무를 찾아내라는 계약이었다. 당연히 핼리버튼은 사기업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죄다 찾아냈다. 그 결과 대담하고도 새로운 펜타곤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민간군수 지원강화 프로그램이었다. 펜타곤은 예전부터 무기 제조업자들과 엄청난 금액의 계약을 맺어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사기업이 군대에 장비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작전 매니저로 일하는 것이었다.
선택받은 일부 회사들만이 미군을 위한 ‘무한정한 병참 지원'에 참가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애매모호했으며, 더군다나 계약금액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낙찰을 받은 회사가 미군을 위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펜타곤에서 모든 비용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윤도 보장되어 있었다. 바로 ’비용 플러스' 계약이었다. 당시는 부시 시니어 행정부의 말기인 1992년으로, 계약을 따낸 회사는 다름 아닌 핼리버튼이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크리스천 밀러(T. Christian Miller)에 따르면, “핼리버튼은 36개 입찰자들을 물리치고 5년 계약을 따냈다. 원래 계획을 제안한 회사가 핼리버튼인 것을 생각하면 놀랄 것도 없다.”
1995년, 백악관에 클린턴 정부가 있을 당시 핼리버튼은 체니를 새로운 사장으로 영입했다. 핼리버튼 계열사인 브라운앤드루트는 오랫동안 미군의 계약업자였다. 그러나 체니의 리더십 아래서 핼리버튼의 역할은 너무나 확장되어 현대전의 본질을 바꿀 정도였다. 체니는 펜타곤에 들어간 뒤 핼리버튼과 융통성 있는 계약을 작성했다. 덕분에 핼리버튼은 병참 지원의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었으며, 해외 미군기지 전체를 건설할 책임까지 맡게 되었다. 군대는 단지 군인과 무기만 제공할 뿐이다. 한마디로 군대는 내용물을 제공하고 나머지는 핼리버튼이 알아서 진행한다.
그 결과는 발칸반도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해외파병은 일종의 중무장한 패키지 휴가 같은 모습이었다. “발칸반도에 군인들이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맞아준 사람은 우리 회사 직원들이었습니다. 떠날 때 작별인사를 해준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핼리버튼의 대변인이 설명했다. 마치 회사 직원들이 군수병참 지원 담당자가 아니라 크루즈 여행의 총책임자인 듯 말했다. 핼리버튼이 다른 회사들과 구별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체니는 미국의 고수익 서비스 경제에 전쟁이 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요컨대 상냥한 미소로 침공 업무를 서비스하는 것이다.
클린턴은 발칸반도에 병력 1만 9,000명을 파견했다. 그리고 핼리버튼이 지은 미니 도시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단정하고 보안시설이 잘 갖춰진 교외지역 같은 모습이었다. 핼리버튼은 군대에 고국의 안락함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패스트푸드 아웃렛, 슈퍼마켓, 영화관, 최첨단 헬스장도 있었다. 일부 고위급 관리들은 군대에 쇼핑몰을 건설하는 것이 군대 훈련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핼리버튼의 모든 것들은 최고급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러니 불평할 것은 없지요.” 핼리버튼으로서는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좋은 사업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계약을 따낼 수 있다. 게다가 사용 비용의 몇 퍼센트를 이윤으로 주는 식이기 때문에 더 많은 비용을 들일수록 이윤도 커진다. “걱정할 것 없소. 비용이 많이 들수록 좋은 거니까.” 이는 바그다드의 그린존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호화스런 전쟁은 클린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체니는 핼리버튼에서 몸담은 5년 동안 미국 재무부로부터 받는 금액을 12억 달러에서 23억 달러로 거의 두 배나 증가시켰다. 게다가 연방대출과 대출보증을 통해 받은 금액은 15배나 증가했다. 그리고 체니 본인도 수고비를 톡톡히 받았다. “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체니의 자산은 1,800만 달러에서 8,190만 달러로 늘어났다. 핼리버튼의 600만~3,000만 달러에 달하는 주식도 포함된다. 체니에겐 총합해서 126만 주 가량의 핼리버튼 주식옵션이 있다. 10만 주는 이미 사용했으며, 현재 76만 주가 청구 가능하다. 그리고 (2000년) 12월이면 16만 6,667주가 적법해진다.
서비스 경제를 정부의 심장부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체니에겐 익숙한 일이다. 1990년대 후반, 그는 미군기지를 핼리버튼이 건설한 교외 지역처럼 바꾸어놓았다. 아내 린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방위계약업체 록히드마틴의 이사로 일하며 임금과 스톡옵션을 받고 있었다. 린은 1995~2001년 록히드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회사의 중요한 전환기였다. 냉전 종식 후 방위비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회사들의 수입은 대개 정부와의 무기계약에서 나온다. 따라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했다. 마침내 록히드 같은 군수물자업체들은 새로운 업무를 공격적으로 추진할 전략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정부를 관리하고 비용을 받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 록히드는 미국 정부의 정보기술 부문을 맡기 시작해 컴퓨터 시스템과 수많은 데이터를 관리했다. 대중은 록히드가 너무 많이 개입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2004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록히드마틴이 미국을 경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놀랄 정도로 많은 부분을 돕고 있다. 여러분의 우편물을 정리하고, 세금을 합산하고, 사회보장수표를 처리하고, 미국의 인구통계를 계산하며, 우주 비행을 관리하고, 항공 교통을 통제한다. 록히드는 이 모든걸 해내느라 마이크로소프트보다 더 많은 컴퓨터 코드를 사용하고 있다.
이 부부는 강력한 한 팀이었다. 딕 체니가 해외에서 핼리버튼을 통해 군대 기반시설을 운영하는 동안 린은 국내에서 정부의 일상적 운영업무를 관리했다. 때때로 둘은 경쟁 상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1996년, 텍사스 정부가 복지시스템을 운영할 회사를 찾는다고 발표했다. 5년에 20억 달러가 달린 계약이었다. 거물급 IT회사인 일렉트로닉데이터시스템(Electronic Data Systems, EDS)과 록히드는 체니가 이사회에 있다고 자랑하며, 둘 다 입찰에 참여했다. 그러나 나중에 클린턴 정부가 개입해 입찰을 중지시켰다. 아무리 아웃소싱의 열정적인 지지자라 할지라도 복지혜택의 수혜 대상을 결정하는 일은 정부의 핵심 역할로 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민영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자 록히드와 EDS는 반칙이라며 울부짖었다. 텍사스 주지사인 조지 W. 부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복지 시스템의 민영화가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조지 W. 부시는 주지사로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만은 두드러졌다. 선거로 당선된 그는 주 정부의 여러 기능을 사업체에 분배했다. 특히 안보기능이 대상이었다. 훗날 테러와의 전쟁을 민영화하려는 생각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재임 시절, 텍사스에서 민영화된 교도소는 26곳에서 42곳으로 증가했다. 「아메리칸 프로스펙트(American Prospect)」는 부시의 텍사스를 '민영화 감옥 사업의 세계적 수도'라고 불렀다. 1997년, FBI는 휴스턴 외곽으로 40마일 떨어진 브라조리아(Brazoria) 카운티 교도소를 조사했다. 한 지역 방송국이 교도소 비디오를 방송에 내보낸 이후였다. 경비원들이 저항하지 못하는 죄수들의 허벅지를 걷어차고 스턴건(Stun Gun)을 쏘고 개로 공격하는 모습이 촬영되었다. 비디오에 나온 한 경비원은 교도소와 경비원 공급계약을 맺은 사기업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부시의 민영화 열정은 브라조리아 사건 후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서, 그는 피노체트 독재 때 사회복지를 민영화한 칠레의 호세 피네라 총리를 만났다. 부시는 마치 예수의 출현이라도 본 듯 행동했다. 피녜라는 그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내 말에 아주 집중했다. 그의 몸짓과 적절한 질문으로 볼 때, 내 사상의 핵심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복지 개혁이 멋진 은퇴, 노동자와 자본주의자들이 어울리는 세상, 오너십 사회를 만든다는 약속 말이다. 그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나중에 웃으면서 내 귀에 '플로리다로 가서 내 동생에게도 말해주시오. 아주 좋아할 겁니다.’ 하고 속삭였다.
국가를 경매에 내놓으려는 미래 대통령의 의지는 체니의 군대 아웃소싱 리더십과 럼즈펠드의 전염병 예방약품의 특허와 혼합되었다. 이 세 남자가 함께 건설한 국가는 바로 완전한 공동(空洞) 국가다. 2000년 부시 선거캠페인에서는 이러한 급진적 프로그램을 중점에 두진 않았다. 그러나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암시는 있었다. “사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연방 공무원들이 수만 명이나 됩니다.” 부시는 한 선거유세 연설에서 말했다. “그러한 업무들은 경쟁적인 입찰에 맡길 겁니다. 사분야가 더 낫다면, 그쪽이 계약을 따야죠.”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나오미 클라인, 모비딕북스, 2021. 369-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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