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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이책재밌다] 길바닥에 쓴 역사, 보도 명판 - <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로먼 마스, 커트 롤스테트

by 길찾기91 202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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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에 쓴 역사 - 보도 명판

 

미국의 원래 수도이자 미국 역사상 수많은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현장인 필라델피아에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와 명판이 곳곳에 널려 있다. 눈에 잘 띄는 이 기념물들 때문에 아리송하면서도 극적이지 않은 표지들은 놓치기가 쉽다. 예컨대 광장의 조각상과 건물에 붙은 명판 외에도 수수께끼 같은 명판들이 보도에 박혀있다. 금속제 명판에 음각 또는 양각으로 빌딩 라인 안쪽 공간은 기부채납되지 않았음 Space within building lines not dedicated”, “이 명판 뒤의 부동산은 기부채납되지 않았음.Property behind this plaque not dedicated” 등 선문답이나 도시적 시구절 같은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다.

 

물권법에서 기부채납이란 소유권을 공공과 같은 제3자에게 넘겨주는 행위를 말한다. 문구들은 각양각색이지만, 이런 지역권 표시는 기본적으로 같은 뜻이다. 지금은 보행자들이 얼마든지 이곳을 걸어도 되지만, 실제로는 이곳이 사유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길고 가는 사각형 명판을 점선처럼 이어놓는 경우도 많다. 모퉁이에서는 직각으로 꺾인 형태의 명판으로 표시한다.

 

2016, 필라델피아 지역지 <플랜필리>에 실린 기사에서 짐 삭사 기자는 이 명판들은 건물이나 조경지역, 울타리, 증개축한 부분의 실제 위치와 소유권 경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공용 토지와 개인 토지 사이의 경계선을 표시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보행자들은 토지소유권이 울타리나 건물 가장자리까지만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특정 개인의 소유권이 보도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밝혀둔 것이다.

 

지역권법은 사람들이 일정한 조건 아래 타인 소유의 토지를 통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한편 불법 점유를 인정하기도 한다. 삭사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누구나 타인 소유의 토지를 법이 정한 기간 (펜실베이니아주의 경우 21) 이상 무단으로 계속해서 독점 사용하면, 그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행적 지역권법에 따르면, 토지 소유자가 명시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경우 누구라도 조건만 충족되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도에 소유권이 기부채납되지 않았다고 쓴 명판이 박혀 있는 것이다. 토지의 소유자는 지금은 공공에게 그 땅을 지나다니도록 해줄지라도 보도의 특정한 부분이 사유지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위해서 명판을 설치한다.

 

도시의 풍경을 이루는 보도 표면의 표시 중에서 이런 명판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낮다. 그 외에도 일반인들이 법률과 상관없이 해놓은 표시들도 있다. 보도의 콘크리트가 마르기 전에 이름을 쓰고 하트 모양으로 테두리를 두른 경우처럼 말이다. 또 소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공식적인 표지들도 있다. 반영구적인 사랑 고백들을 살펴보다 보면 그 사이에서 보도를 시공한 건설회사가 남긴 우아한 서명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보도에는 포장재로 보도블록이나 넓은 돌판 대신 싸고 튼튼한 콘크리트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1900년대 초에 만든 음각 표지나 명판이 많다. 이 중 많은 수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가 급속하게 성장하던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멘트 위에는 장식 선으로 둘러싼 모양 안에 시공 날짜, 주소, 전화번호, 심지어 조합원 번호까지도 새겨져 있다. 궁금하다면 조합사무소에 가서 번호를 조회해 50년 전 보도 마감 작업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아낼 수도 있다.

 

시카고에는 이런 표지가 더 많다. 내용도 더 상세하다. “콘크리트 보도를 완공하기 전에 보도를 시공한 업자나 개인은 시공 보도에 식각 또는 명판으로 자신의 이름과 주소 및 시공연도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지역 법규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표지들은 도시의 역사와 도시건축사업, 지역개발과 확장에 대한 개요를 밝히고 있기에 도시개발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로 활용되게 됐다.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의 보도에는 수십 년에 걸쳐 가족기업이 변화해온 역사를 추적하게 해주는 표시도 있다. 1908년의 보도표지에는 시공자가 '폴 슈누어 Paul Schnoor'라고 돼 있는데 한참 뒤에 만들어진 표지에는 '슈누어와 아들들 Schnoor & Sons'로 돼 있다. 자녀들이 아버지 사업에 참여하면서 회사 이름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최근의 건설 현장에는 '슈누어 형제들Schnoor Bros'이라는 표지가 있다. 아버지가 은퇴하고 자식들이 회사를 물려받았음을 보여준다.

 

보도표지를 도로표지판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교차로 보도에 거리 이름을 새겨놓음으로써 길 찾기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철자를 틀린 경우도 없지 않다. 1909, 캘거리 헤럴드에는 'Linclon'이나 'Secound Avenue' 처럼 철자가 틀린 지명이 보도에 새겨져 있는 것을 개탄하는 캘거리의 철자 오류"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곧 사라질 변방 마을에서나 통할 만한 직업윤리가 캘거리에서 허용되도록 해선 안 된다면서 보도 석판에 거리명이 영구적으로 잘못 표기되는 부끄러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자 캐나다 앨버타주의 자부심 강한 당국은 도시가 그 이상의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보도표지를 깨트렸다. 반면 샌디에이고나 다른 도시에선 옛 보도표지들(적어도 철자가 맞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보존한다. 오래된 표지가 있는 보도를 깨트리거나 교체하는 공사를 하는 건설업자는 도시 역사가 보존될 수 있도록 표지를 우회해 공사해야 한다는 작업 지침에 따른다.

 

지금은 새로 만드는 보도에 표시를 새기도록 요구하는 도시가 많지 않다. 요즘 건설사들은 예전보다 일하는 맛이 덜하지 않을까 싶다. 시 당국은 건설사가 보도에 시공자 이름을 남기려는 경우, 반드시 사전에 허가를 받도록 하는 한편 허가를 내주더라도 아주 작게 만들도록 규제한다. 이런 보도가 수십 년 넘게 사용되는 공짜 광고판이 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건설한 사람이 누구인지, 세대가 여러 번 바뀌어도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무릎을 꿇고 표면을 매끄럽게 마감한 사람이 누구인지 등 풍성한 역사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보도표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다. 철자가 틀리지 않는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로먼 마스, 커트 롤스테트, 어크로스, 2021.10, 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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