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경우
이스라엘 국민들, 특히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확고하고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있다고 믿은 나머지 신화를 더욱 무리하게 구성했다. 유대 민족은 모세가 시나이산(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부터 항상 존재해왔으며, 자신들이야말로 유대 민족(아직 자취를 찾지 못한 열 지파는 제외하고)의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후손이라는 것을 사실로 확신한다. 이 민족은 이집트에서 '탈출'했으며, 이른바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신이 이 민족에게 약속한 땅을 정복해 정착했다. 이후 유대 민족은 장엄한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탄생시켰고, 이 왕국이 후에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또한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인한 제1차 성전파괴와 서기 70년 유대전쟁으로 인한 제2차 성전파괴 이후 유랑을 하게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유일무이한 민족은 두 번째 유랑을 시작하기 전에 사악한 헬레니즘에 대항해 하스몬 왕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으로 거의 이천 년 동안 유랑 생활을 했지만, 이방인들 틈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들과 통합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끝내 피했다고 믿는다. 이 민족은 고된 방랑 속에서 예멘, 모로코, 스페인, 독일, 폴란드, 그리고 멀리 러시아까지 이를 만큼 널리널리 흩어졌다. 하지만 이토록 널리 퍼진 공동체들 사이에서도 긴밀한 혈연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그 독특함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19세기 말에 일어난 보기 드문 상황이 이 고대 민중을 긴 잠에서 깨웠고, 다시 활력을 찾아 고대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준비시켰다. 그리하여 이 민족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인은 지금도 이 일이 히틀러가 저지른 만행 때문이라고 믿는다. ‘알리야'를 원하는 유대인 수백만 명이 '에레츠 이스라엘'을 삽시간에 가득 채운 것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유랑하는 민족은 그들만의 땅이 필요했고, 마침 아무도 살지 않던 텅 빈 땅이 있어서 어느 민족이 와서 꽃피워주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고향땅에는 이미 낯선 불청객들이 와서 정착해 있었지만(이건 사실이다), 이 민족은 이천 년 동안 '디아스포라 상황에서도 언제 어디에 살건 항상 신앙을 곁에 두고 지켰기에’ 이 땅은 오직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땅이었다. 역사의식도 없이 어쩌다 이곳에 들어오게 된 저 성가신 이들에게는 맞지 않는 땅이었다. 그렇게 하여 이 유랑 민족이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벌인 전쟁들이 정당화되었다. 현지 주민들의 폭력적인 저항은 범죄였다. 나아가 이 이방인들이 계속 이 땅에 남아 유대 민족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유대인들의 (너무나 비성서적인) 자비심 덕분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서의 언어를 되찾았고 경이의 땅으로 되돌아왔다.
이스라엘에서도 이 기억이라는 짐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재능 있는 기억의 구성자들이 19세기 후반기부터 시작해 층층이 쌓아올린 것이다. 그들은 우선 유대교에 전해 내려오는 종교적 기억의 파편들과 그리스도교가 가진 기억의 파편들을 모은 다음, 그 파편들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해 이른바 '유대 민중'에 관한 길고도 단절되지 않은 계보를 구성해냈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이런 공적 기억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적이 없었다. 또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만, 이후에도 그 기억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별로 바뀐 것이 없다. 영국 통치하의 예루살렘과 건국 후 이스라엘에 대학들이 설립되고 서구 전역에도 유대인 연구 과목이 개설되는 등 유대 역사 연구가 학문적 영역으로 들어왔음에도, 유대 과거에 대한 관념은 통일된 민족-종족적 성격을 오늘날까지 간직한 채 거의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물론 다른 접근법들도 이 방대한 유대교 및 유대 역사학에 동원되었다. ‘민족의 과거'라는 매우 건질 게 많은 이 분야에서 의견 대립과 논쟁이 부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논쟁이 치열해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형성, 수용된 기본 개념에 도전하는 학자는 거의 없었다. 20세기 말 서구 세계의 역사 연구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고 민족 및 민족주의 연구에서도 중대한 패러다임 교체가 있었지만, 이스라엘 여러 대학에 개설된 '이스라엘 민중사’(유대 역사라고도 알려진) 과목들은 그런 변화들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지만 미국이나 유럽 여러 대학의 유대 연구 학과들이 내놓은 풍부한 성과물에서도 그런 변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가끔 어떤 연구 결과가 나와서 단절 없는 직선적 유대 역사라는 그림을 위협해도, 그 연구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그런 연구 결과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도 금세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민족적 긴급 상황이라는 자물쇠가 지배 서사를 옥죄어 어떤 것도 이탈하지 못하게 했다. 유대인과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과거에 관한 자료의 생산을 맡은 저 독특한 연구 체제도 경악할 정도의 학문적 마비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즉 유대 역사학과들이 따로 설립되어 일반 역사 및 중동 역사학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배타적으로 연구를 수행했던 것이다. 이 유대 역사학과들의 고집스런 배타성 때문에 유대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냉철하게 조사할 새로운 역사학이 나올 길도 막혀버리게 되었다. 때때로 '유대인이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나와서 이스라엘 여론을 흔들곤 했지만(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질문이 법적 쟁점을 수반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래도 이스라엘 역사가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답을 알고 있었다. 즉 유대인이란 '이천 년 전에 추방된 민족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새로운 역사가들의 논쟁이 이스라엘의 기억 구조를 흔들어놓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권위 있는 역사가들 가운데 이 논쟁에 참여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이 공개 논쟁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이들 대부분은 다른 분야 학자이거나 학계 외부 인물이었다. 사회학자, 정치학자, 동양학자, 문헌학자, 지리학자, 문학자, 고고학자, 그리고 몇 명의 자유기고가가 유대, 시오니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그중 일부는 이스라엘 밖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스라엘 안에서는 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새로운 연구의 원천이 되어야 할 유대 역사학과들은 오로지 변명과 관습적인 수사법의 틀에 갇힌,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보수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대항역사(counter-history)가 등장하여 1948년 전쟁의 여러 국면들과 결과, 그중에서도 특히 이 전쟁의 도덕적 함의를 중점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논의는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기억의 형상화 방식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1948년 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는 이스라엘인의 양심을 괴롭혀온 이 문제는, 이스라엘국의 미래 정치에도 중요하지만 아마도 국가의 미래 존립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사안이 될 것이다. 팔레스타인인과의 의미 있는 화해가 언젠가 실현된다면, 유대인들의 역사뿐 아니라 이들 '타자들의 최근 역사도 함께 다루어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의미 있는 논의도 학문 영역에서만 제한적 성과를 냈을 뿐 대중적인 인식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나이든 기성세대들은 모든 새로운 연구 결과 및 평가를 모조리 거부해 왔다. 그들은 역사의 향방을 이끌어왔다고 믿는 자신들의 엄격한 도덕률과 이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융화시킬 수 없었다. 지식인 가운데 좀 더 젊은 세대들은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범죄가 자행되었음을 충분히 수긍할 용의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범죄를 예외적인 일로 돌리는 아전인수식의 상대적 도덕률을 견지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렇게 되물었다.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나크바'가 뭐 그리 나빴다는 건가? 짧은 기간 동안 제한적으로 벌어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어떻게 이천 년 유배의 고통에 비길 수 있단 말인가?
한편, '정치적 범죄'보다 시오니스트들의 장기간에 걸친 의도에 주목했던 사회역사학 연구들은 아예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그 연구서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썼음에도 히브리어로는 한 번도 출판되지 않았다. 민족 역사를 뒷받침하는 패러다임들에 의문을 제기한 몇 안 되는 히브리어 저작들은 냉대를 받았다. 그중에는 보아스 에브론의 대담한 책 『유대국가인가, 이스라엘 민족인가?』와 우리 람의 흥미로운 논문 「시오니스트 역사학, 그리고 근대 유대 민족의 창안」도 있었다. 에브론과 람은 모두 유대 과거를 직업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에 급진적인 도전장을 던졌지만, 유대 과거의 권위 있는 생산자들은 그런 도전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산드, 사월의책, 2022. 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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