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그룹 "Three Go, 걷고 읽고 먹고" 시즌 1, 에피소드 1
2020년 6월 8일(월) 15:00~20:00
코로나로 방콕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늘어가는 뱃살과 약간의 무기력을 이겨내고자 걷기 참여.
지난번 모임에서 독서그룹을 만들기로 하고 책만 읽기보다는 걷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즐거움을 누리자는데 합의한 바.
이름은 '걷고읽고먹고'를 요약하여 'Three Go'로 정했다.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쓰리고'.
그 첫번째 일정으로 걷게된 코스는 김수영문학관 → 정의공주묘 → 연산군묘 → 북한산둘레길 → 솔밭공원 → 419묘역까지.
쌍문역에서 모여 마을버스로 이동한 김수영문학관은 애석하게도 코로나로 인한 휴관. 그저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정의공주 묘
첫번째 방문한 곳은 정의공주 묘. 그의 부군 양효공 안맹담과 나란히 묻혀 있는 곳으로 도봉산 시루봉 남쪽에 위치해 있다. 주소로는 도봉구 방학동 산63-1번지. 정의공주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의 둘째 딸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다. 조선의 제5대 왕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제7대 왕 세조의 누나다. 세종이 왕족으로 태어난 첫번째 왕이었으니 그의 딸 정의공주는 그야말로 왕족이다. 이전의 왕들은 사가의 일원에서 왕족으로 변경된 경우다. 태어날 때부터 왕족이었던 왕은 세종이 첫번째다.
정의공주에 대한 기록으로는 『죽산안씨대동보』에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변음토착(變音吐着)을 완전히 궁구하지 못하여서 각 대군들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는데, 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가 곧 풀어 바쳐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 연산군 묘
다음 이동한 곳은 사적 제362호로 지정된 연산군 묘.
연산군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됐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으로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이곳에는 그의 부인 신씨도 함께 묻혀 있다.
조선왕조사에서 연산군만큼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삶을 산 이도 드물다.
연산군은 1476년(성종 7)에 성종과 윤기무(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종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융(小隆)이고, 1483년(성종 14)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성종은 원자의 모후를 폐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도 두 번째 왕비였던 윤씨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어린 원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그래서 세자 융은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생모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세자 융과 정현왕후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없었다. 성종 역시 제왕으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세자를 미덥지 않게 여겼다. 윤씨를 쫓아낸 장본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역시 마음의 짐 때문인지 손자인 연산군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연산군은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연산군은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집요하고 거친 면이 있었는데, 왕위에 오른 후 이러한 성격이 부각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그때마다 연산군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은 어김없이 화를 당했다. 특히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모두 알고 나서 그와 연루된 인물들이 모두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유교적 통치이념에 입각해 군주로서의 자격을 논한 사람들 역시 죽임당하는 등 연산군 즉위 후 조정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유교적 통치이념을 거부한 파격 군주인 연산군은 조선왕조의 어떤 왕과도 성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 윤리를 거부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유교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신료들과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교적 이상주의 국가를 꿈꾸던 사림들과는 더욱 갈등이 심했다.
연산군은 두 번의 사화를 통해 자신을 귀찮게 괴롭히던 사림들을 제거하고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연산군은 한편으로는 장녹수(張綠水)라는 궁녀뿐만 아니라 궁인과 기생은 물론이고 여염집 아녀자들까지 거침없이 희롱했으며, 심지어 친족과 간음하는 등 패륜적 행위를 불사했다. 또한 전국에서 운평(가무를 담당하던 기생)을 뽑아 대궐에 들여 '흥청(興淸)'이라고 하고, 밤낮으로 풍악을 울렸다. 여기에서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했다. 결국 민심을 잃은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해 진행된 중종반정으로 권력을 잃고 말년을 초라하게 보내게 된다.
* 북한산 둘레길 중 왕실묘역길
연산군묘와 바로 이어진 길은 북한산 둘레길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전체적으로는 훨씬 긴 코스지만 마침 우리가 가려던 방향이 4.19 묘역이라 중간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른바 '왕실묘역길'이다. 32도의 더운 날씨였지만 산 속의 길은 그리 덥지 않았다. 마을 중간에 있는 작은 산이며, 그 안의 걷기좋은 길은 걷기여행자에겐 아주 좋은 곳이다. 그 길을 지나 4,19묘역으로 가는 길엔 솔밭공원도 있다.
* 국립 4.19 묘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4.19의 특별함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4.19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학정에 대항하여 일으킨 민주혁명이었다. 이곳은 1960년 4.19 시기에 희생당한 분들을 모신 묘역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라면 누구나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비폭력 혁명을 이루었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을 모신 곳이니 말이다.
* 후기
점심이 지난 시점에 출발한 걷기여행이다 보니 날씨는 매우 덥고 땀은 흘렀지만 가는 곳마다 묘역이었던 특별한 경험을 한 날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묘역이지만 잠시 그들을 기억하고 새기는 시간이었다.
어느 누구의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있겠냐마는 각 죽음의 가치는 조금씩 다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적 인물로 알려진 이들은 이렇게 묘역을 조성해서 후손들에게 기억되기도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삶과 죽음이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닐테니 말이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든 날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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