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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걷기

Three Go(걷고 읽고 먹고) 시즌1 ep3-1 서울역, 7017서울로, 남산, 평래옥

by 길찾기91 2020.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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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Go(걷고읽고먹고) 모임 가서 four Go(걷고읽고먹고그리고)하고 왔다.

 

 

길고도 긴 장마 기간 중에도 잠시 비가 안오는 시간은 있기 마련.

애초 계획은 월요일이었는데 예보를 보니 불가할듯하여 화요일로 옮긴 게 지난 주.

이후 예보로는 화요일에도 비가 온댔지만 일단 강행. ‘갈 수 있는 만큼만 걷지 뭐라는 생각으로. 결국 성공적 하루.

 

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 모였다. 강우규 열사 동상이 서울역 광장에 있는걸 아는 이도 드문 듯. 이 분이 중요한 게 이 열사의 폭탄 사건 이후 일제가 엄청 허둥거렸다는 점. 일제 요인 암살이 매우 유용한 투쟁의 수단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게 된다.

 

조선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태운 특별열차는 오후 5시 정각에 플랫폼에 들어섰다. 사이토 총독은 열차에서 내려 1,000여 명의 환영객이 운집한 곳으로 가 악수를 나누고는 남대문역 광장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총독 내외와 정무총감 내외가 탈 마차가 각각 준비되어 있었다.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마차에서 약 12~3m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였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튄 파편 몇 조각은 총독의 혁대에 박혔으나 총독은 무사하였다. 다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중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의 경성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와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末弘又二郞)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거사를 일으킨 지 16일 만인 9월 17일 누하동에서 한국인 경찰 김태석(金泰錫)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김태석은 당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警部)로, 후일 의열단에서 ‘칠가살(七可殺)’ 대상자 가운데 1명으로 지목되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 친일경찰이었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은 강우규에게 사형, 최자남에게 징역 3년, 허형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였다. 이 판결에 대해 허형은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옥고를 치렀다. 강우규는 곧바로 공소하였다. 이유는 자신의 사형을 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거사를 도와준 동지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 이어 5월 27일 고등법원(高等法院, 오늘날 대법원에 해당)에서도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3심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고취지서도 직접 작성하였다. 상고이유서에 보면 총독을 처단하고자 한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상고 기각 후 6개월 뒤인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은 서대문형무소로 사형집행 명령서를 발송하였다. 사형일자는 3일 뒤인 11월 29일이었다. 29일 오전 9시 30분, 서대문형무소측은 종로구치감에 갇혀있던 그를 데려왔고, 10시 30분 오카모토(岡本) 검사가 입회한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때 세상을 떠나며 시를 남겼다. 이른바 사세시(辭世詩)이다.

사세시(辭世詩)

단두대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有身無國 豈無感想

                                                         -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서울역 옛 역사는 대칭이 안되는 건축이다. 일본의 어떤 역을 짓기 전에 습작(?)으로 지은 것이 서울역이란다. 스톡홀름의 어느 역사를 보며 일본이 역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여러 가지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서울역을 지었단다. 나 여태 이런 내용 몰랐다.

 

 

출발하여 간 곳은 서울로7017.

1970년에 개통했던 고가도로를 2017년에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라 명명한 이름이다.

전에 이 길을 걸었던 날도 비오는 날이었는데. 그나마 나은 건 이번엔 흐리기만 했다는 것. 비가 올듯 흐린 날이 지속된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엄청 습해서 땀이 비오듯 했다.

 

 

빗물이 서울한양도성이라는 글씨를 부각시킨다

 

7017공원을 지나 남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양도성길의 일부인 그곳에는 날씨 때문인지 거의 사람이 없다. 고즈넉하고 좋네. 남산공원으로 들어가 성곽길을 걷다 보니 백범광장이 나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의 동상이 커다랗게 서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호현당이 있고 옛 남산도서관을 거쳐 여유롭게 한참을 걸어 기억의 터로 내려가니 위안부를 기리는 조형물과 해설이 있다. 그 시대에 그 분들이 겪은 일에 대해 생각하니 말로 형언키 어려운 힘겨움이 다가온다.

 

 

바로 옆에는 통감관저터가 있다. 친일파 이완용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1910822일 한일병합에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이 곳엔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다. 국치 이후 이곳은 조선총독관저가 됐었다. 서울시는 광복70주년을 맞아 이 곳에 거꾸로 세운 동상을 세웠고, 이듬해 기억의 터를 조성했다.

 

거꾸로 세운 동상은 하야시 곤스케(1860~1939, 1900년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는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19051117, 덕수궁 중명전)을 강요하는 등 병탄의 발판을 닦은 자다. 일제는 그 공으로 남작 작위를 내리고 대한제국이 국치(1910년 경술년 8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서명하고 29일 발표)를 당한 이곳 한국통감관저에 동상을 세웠다. 동상 이름은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助君像)이다. 광복70주년을 맞아 흩어진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워 욕스러움을 기린다.

 

역사의 어두웠던 과거를 기억하며 조금 더 가니 서울유스호스텔이 나온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생활치료센터로 활용 중이지만 이 곳 역시 어두운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옛 중앙정보부 남산본관이 있던 곳이다. 근처엔 중앙정보국 5국이었던 서울시청 남산1별관도 있다.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걸어내려온 곳은 한옥마을 방향.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역사를 생각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습하고 더운 날씨 속에서 두 시간 여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이동한 곳은 평래옥. 초계 음식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물론 난 처음 방문이다. 아주 시원한 초계탕으로 저녁을 포식하고 나니 슬슬 나른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일정이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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