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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 법률 대리인 선임, 전 대법관 김능환 변호사 프로필 및 경력

by 길찾기91 202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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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능환 변호사, 전 정무직공무원
출생 1951년 10월 23일, 충북 진천군
나이 73세 (만 71세)
 
 
  • ~1975.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 경기고등학교

 

  • 법무법인 율촌 고문
  • 2013.08.~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 2011.02.~2013.제17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2006.07.~2012.07.대법원 대법관
  • 2005.~2006.06.울산지방법원 법원장
  • 2004.~2005.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2003.~2004.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 2002.~2003.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
  • 2000.~2002.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1999.~2000.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 1998.~1999.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지원장
  • 1997.~1998.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 1996.~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 1994.~1996.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 1992.~1994.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지원장
  • 1990.~1992.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 1988.~서울고등법원 판사
  • 1985.~인천지방법원 판사
  • 1983.~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
  • 1980.~전주지방법원 판사
  • 1977.~육군법무관
  • 1977.~제7기 사법연수원 수료
  • 1975.~제17회 사법시험 합격

 

 

-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21년까지 율촌에 몸 담았던 이 장관은 윤 변호사에게 직접 법률 대리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판사 출신인 윤 변호사는 법원행정처 법정심의관, 대법원 재판연구관,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 등을 거쳐 서울서부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뒤 1999년 법무법인 율촌에 합류했다.

이 장관은 윤용섭 변호사와 함께 김능환 전 대법관을 탄핵심판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김 전 대법관은 2013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뒤 부인이 연 편의점의 아르바이트를 하다 같은 해 8월 율촌에 합류했다.   - 파이낸셜뉴스 2023.2.14

 

 

- 20127월 대법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대법관에서 퇴임했을 때, 부인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업으로 편의점과 채소가게를 열어 화제가 됐다. 참고로 당시 김능환의 재산은 9억여원으로 2012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때 전체 대법관 중 꼴찌에서 두번째였다.

20133월에는 중앙선관위원장직에서도 물러났다. 중앙선관위원장직에서 퇴임한 후 아내가 마련한 편의점과 채소가게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의 삶을 선택해 청백리라는 칭송을 받았다.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 등으로 거론됐으나 그동안 과분한 일을 했다. 나에게 더 이상 공직은 없다고 못박았다. 여러 대학의 초청에 대해서도 선생이 돼 학생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 못된다며 거부했다.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꿈이 있다면 편의점과 채소가게가 먹고살 만큼 잘 돼서 집사람과 함께 잘 지내는 것이라는 말을 하여 수많은 네티즌이 앞다투어 존경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개월 뒤인 20138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는 말을 남기고 대형 로펌 '율촌'에 들어갔다. ‘무항산 무항심<맹자>양혜왕상편에 나오는 말로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김 전 대법관이 무항산 무항심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거취 인사를 대신한 것은 경제적 문제가 로펌행을 결정짓는 이유 중 하나라는 점을 솔직히 밝힌 것으로 보인다.

법무법인 율촌의 고문으로 20141월 처음 판결문에 변호인으로 이름을 올린 뒤 201511월까지만 41건의 대법원 상고심 사건을 맡아 6건이나 파기환송(14.6%)시키는 등 이른바 끗발 좋다는 평가를 받으며 여러 상고심을 맡아 진행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 역시 대법원 상고심을 앞두고 김능환 전 대법관을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 나무위키

 

 

-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을 지내고 대위로 전역하였다.

1980년 전주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판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 현직 고교 교사 등 9명의 연구모임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오송회 사건에서 배석판사로 관여해 피고인 6명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고, 1992년 충주지원장 시절 김보은 양 사건의 1심 선고를 맡았었다. 이후에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주역 김현장씨에 대한 보안관찰기간 갱신 부당 판결, 재임용 탈락 서울대 김민수 교수 복직 판결, 김현철 사면정보 공개 판결 등 진보적 판결로 이름을 날렸다.

2005년부터 20066월까지는 울산지방법원 법원장을 지냈다. 20051월 이중국적자가 만 18세가 되기 전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병역의무를 부과 받은 경우 병역을 이행하거나 면제받기 전에는 국적을 이탈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병역의무 기피 풍조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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