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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장마전선, 조선에 경신대기근을 몰고 오다 -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이동민, 갈매나무

by 길찾기91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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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전선, 조선에 경신대기근을 몰고 오다

청나라가 건국된 뒤에도 동아시아의 소빙기는 이어졌다. 이자성의 난까지 겪은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17세기 중반에 대기근이 이어져 굶어 죽는 사람만 10만 명에 달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조선 역시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7세기 초중반에 여러 차례 기근을 겪었다. 조선에 닥친 기근은 매우 심했다. "여름철 장마전선이한반도에서 정체되는 현상이 나타나 가뜩이나 많은 장마철 강수량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났고, 여름철 일조량은 평년보다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1660 년대에 접어들면서 수십 년 넘게 위축됐던 동아시아 하계 계절풍 세력이 인도 계절풍 약화에 따른 대기와 해수 순환의 변화로 인해 다시금 강해지기 시작한 것과 관계 깊다. 소빙기 동안, 동아시아 하계 계절풍이 약해진 시기에는 명나라에 가뭄이 발생했고, 동아시아 하계 계절풍 세력이 다시 회복된 시기에는 조선이 극심한 기근을 겪은 것이다. 장마전선의 정체로 빚어진 수해와 냉해는 조선의 농업에 치명타를 입혔다.

현종 재위기였던 1670년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보다도 더 참혹했다고 회자되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인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1670년에는 봄부터 초가을까지 우박과 서리가 내렸고, 봄에는 극심한 가뭄이 닥치더니 여름에는 너무 많은 비가 왔고 초가을인 음력 7월에는 눈까지 내렸다. 대흉작은 당연한 결과였고, 이상기후 속에서 전염병까지 번져갔다. 이에 조정은 도성에 질병 치료소인 활인서를 설치해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고 끼니를 거르는 백성에게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를 세우는 등 대기근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 농사를 망친 1670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는 춘궁기의 고난을 줄이기 위해 곡물을 빌려주고 추수할 때 갚도록 하는 환곡 또한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하지만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기아와 전염병의 규모는 이러한 노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활인서가 되레 전염병 유행의 진원지가 되는가 하면, 농사짓는 데 필수적인 소까지 전염병에 걸려 대량으로 폐사하는 바람에 조선의 농업 생산력은 더욱 심하게 떨어졌다. 1670 년 겨울을 지나면서 조선은 글자 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양반과 왕족마저 길거리에 나와서 구걸을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고, 급기야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길거리에 방치된 채 부패해가는 전쟁통에서도 보기 힘든 극심한 참상이 일어났다. 조선군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 떼강도 행각을 벌이는가 하면, 굶주림을 못 이긴 어느 여성 노비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직후 숨을 거두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조선 인구의 최대 14퍼센트에달하는 100만~140만 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1671년 말부터 이상저온 현상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면서 조선은 참혹했던 대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빙기의 대기근으로 무너진 명나라와 달리 조선은 그 뒤로도 체제를 유지했다. 청나라와 일본이 대기근 속에서 내부 체제 정비에 주력한 덕에 조선은 외세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았다. 대기근을 극복하기 위한 조선 조정과 관리들의 대책 마련과 노력 역시 조선의 사회와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했다.

경신대기근은 이후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기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조선 조정이 바닥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대량의 화폐를 주조했고, 그로 인해 현물과 물물교환의 비중이 컸던 조선의 경제는 화폐경제로 변모해갔다. 특히 복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던 노비 계층에서 막대한 사망자가 나오고, 화폐경제의 발달 덕분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상민 계층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엄격한 신분제에도 동요가 일어났다. 한랭해진 기후로 인해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함경도 산삼이 대량으로 말라 죽어 인삼 재배가 본격화되었고, 한편으로 방한복의 필요성도 늘어나면서 모피와 산삼을 구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와 만주에 진출했다.

경신대기근을 비롯한 17세기 소빙기의 기근은 당장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중세 말 유럽을 뒤흔든 흑사병이 서양 중세를 종식시킨 것처럼, 17세기 소빙기가 불러온 대기근은 조선을 점점 변화시키며 한반도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로 인도했다.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이동민, 갈매나무, 2023, 175-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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