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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힘
윤석열은 경청하지 않는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기시다 일본 총리를 만날 때를 빼고는 모든 곳에서 발언 시간을 독차지한다. 게다가 툭하면 '격노'한다. 격노는 비속함의 표현이다. 사악한 사람은 화가 나도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든다. 조용히 타격을 가하고 손을 봐준다. 어느 유명한 '친윤' 신문의 '친윤' 언론인이 쓴 칼럼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59분 대통령? 한 시간 회의하면 59분을 쓴다고? 설마! 영수회담 비공개 대화에 배석한 민주당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당 대표와 비공개 대담하면서 시간의 85퍼센트를 썼는데, 부하들하고 회의할 때는 오죽했겠는가. 명예훼손이라고 격노할지 몰라서 용핵관(용산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들은 75퍼센트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KBS가 신년 기자회견 대용으로 제작 송출한 미니다큐와 용핵관들의 발언에서 드러난 기념사 원고 작성 방식은 엽기적일 정도로 비속하다. 용핵관들은 기념사를 대통령이 손수 썼다고 언론에 자랑했다. 그런 정보를 참고해 재구성하면 이렇게 진행한 듯하다. 윤석열이 요지를 구술한다. 실무자는 받아적는다. 문장을 다듬어 만든 초안을 올린다. 윤석열이 몇 가지 고쳐서 기념사를 완성한다. 행사 직전에 한두 문장을 즉흥적으로 넣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3.1절이든, 5.18이든, 8.15이든 모든 기념사가 부적절하고 엉뚱했다. 죄 없는 연설 비서관을 욕해서 미안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부족함을 모르면 학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비속함을 인지하지 못하면 비속함을 극복할 수 없다. 모든 일을 현재 수준에서 판단하고 실행하면서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래서 그는 2년 넘게 대통령을 했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완성형 대통령'이다. 앞으로도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속한 권력자한테는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참모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막아서지 못한다. 자칫하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쌍욕을 듣는다.
대통령실부터 내각과 공공기관까지 정부의 모든 조직은 비속하거나 비속한 척하는 사람으로 채워졌다. 누구도 자기 머리로 생각하거나 자기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 하면서 윗사람이 좋아할 말만 한다. 창의적인 사람은 조직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창의성을 숨긴다. 사업을 먼저 제안하거나 건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민을 속이는 것도 솜씨 있게 하지 못한다. 채해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보라. 극히 빈약한 인력으로 진행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와 군사법원의 박정훈 재판 과정에서 윤석열이 격노해 국방부장관의 결재를 취소하게 했고 대통령실 참모들이 개입해 경찰에 넘어간 수사 자료를 국방부가 되찾아오게 했다는 사실이 거의 다 드러났다.
윤석열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며 자신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옳은 일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있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각성을 일으킨다. 그렇게 행동한 이들이 있다. 누가 생각나는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채해병 순직 사건을 법대로 처리한 군인, 아이들을 지키려고 현직 검사인 시누남편의 비리 증거를 공개한 어머니, 검찰의 압수수색과 조사를 받으면서도 '디지털 캐비닛'의 존재를 확인 보도한 인터넷 언론사의 기자, 대검찰청 검사들이 야권 인사와 언론인을 고발하도록 국민의힘 (국힘당) 당직자를 부추겼다는 사실을 폭로한 정치인이 떠오른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해서 옳은 일을 했다. 진실을 알리고 용기를 퍼뜨렸다. 스스로 사유하는 사람은 힘이 있다.
'국힘당'이라 약칭을 쓴 이유를 해명하고 넘어가자. 나는 ‘국민의 힘'을 믿는다. 경제 발전도 민주화도 모두 '국민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국민 절반이 싫어한다. 그래서 둘을 구분하려고 약칭을 쓴다. '국힘당' 정치인들이 약칭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혹시라도 '국민의힘' 관계자가 읽는다면 사정을 너그럽게 헤아려주기 바란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대들의 잘못이다. 감히 국민의 힘을 참칭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다시 말한다. 비속해지면 악에 물든다. 스스로 사유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려고 노력해야 비속함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런 각성을 한 시민이 최근 부쩍 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윤석열이 민생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면서 수천 조 규모의 공약을 쏟아내고 신문 방송 대부분이 국힘당 선전기관 노릇을 했는데도 야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을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무덤을 파는 사람을 스스로 만들어 내면서도 그런 줄 모른다. 그것도 비속함의 증상이다.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시민, 생각의길, 2024, 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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