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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감정의 고통
자기에게 불편한 감정이 생기면 억제하거나 회피하려는 까닭은 그 감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감정은 얼마큼 고통스러울까? 슬플 때와 손을 칼날에 베였을 때의 고통이 서로 비슷할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났을 때 느끼는 마음의 고통과 외상을 입었을 때 느끼는 몸의 고통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클까?
신체에 고통이 생기면 전방대상회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ACC이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 나오미 아이젠버 Naomi Eisenberger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신체적인 통증과 정신적인 통증의 관계를 연구했다. 사회적으로 거절당하는 일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가에 관한 연구였다.
연구자들은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실험을 했다. 실험 참여자는 컴퓨터로 가상의 공 던지기 게임을 했다. 가상현실 속의 두 동료와 공평하게 공을 주고받으라는 규칙을 전달받고 게임에 임했다. 그런데 게임 도중에 갑자기 (미리 약속한) 두 사람이 규칙을 깨고 자기들끼리만 공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험 참여자 뇌의 전방대상회피질에 즉각 반응이 일어났다. 즉 신체 고통이 느껴질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갑자기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감정에도 신체의 고통과 유사한 고통이 나타남이 밝혀졌다.
이렇게 감정의 고통이 신체의 고통과 유사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마음이 아플 때 신체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진통제가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즉, 마음이 아플 때에도 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이 완화될까? 아이젠버거 박사는 또 다른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자들은 실험 참여자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2,000mg의 아세타미노핀(진통제) 알약을 주고, 다른 그룹에는 같은 모양의 플라세보(위약) 알약을 줬다. 두 그룹 모두에게 알약의 절반은 아침에 일어나서 먹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밤에 자기 전에 복용하게 했다. 그러고는 '아픈 마음'의 정도를 보고하게 했다. 가짜 약을 먹은 참여자들은 아픈 마음에 큰 변화가 없었다. 반면에 아세타미노핀을 복용한 참여자들은 3주 안에 '아픈 마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당시의 뇌를 스캔해봤더니 고통이 있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인 전방대상회피질이 아세타미노핀을 복용한 참여자들에게는 덜 활성화되어 있었단다. 그 참여자들은 실제로 아픈 마음이 줄었다고 생각했으며 뇌 촬영에서도 그런 반응이 나타났다.
이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 감정의 고통은 실재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의 고통도 신체의 고통처럼 돌봐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고통은 결코 가짜가 아니기에 신체가 고통스러운 만큼 실제로 아픈 것이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면 간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몸살감기를 앓고 있는 사람의 이마를 짚듯 진심으로 위로하고 응원해야 한다.
그런데 몸을 다쳤을 때 진통제만 투약해서는 제대로 치료가 안 되듯이, 마음의 고통도 진통제만으로는 마음을 제대로 치유할 수 없다. 그 치유 과정은 어느 정도의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흔히 우리는 감정의 고통을 잠시 회피하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불쑥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것은 나름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진통제일 따름이다.
마음의 고통이 매우 심한 사람들 중에는 자해나 자살을 생각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고통이 너무 크고 더 이상 고통을 줄일 방법을 못 찾겠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죽음을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내담자에게는 가끔 진통제의 일환으로 얼음주머니 연습을 권한다. 얼음주머니를 힘껏 손에 쥐고는 1분 동안 참아내는 연습이다. 얼음을 쥐고 있으면 통증이 꽤 심하다. 내담자가 1분을 참아내고 나면 순간적으로 신체의 고통과 함께 마음의 고통도 사라진다. 신체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내인성 진통 효과가 마음의 고통도 함께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의 고통이 클 때는 진통제 같은 대처 방안이 필요하다. 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을 위해 장기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몸을 다친 환자에게 투약한 진통제만으로는 환장의 신체 부위에 번진 염증과 상처를 낫게 할 수 없듯이, 마음의 고통이 매우 큰 분들에게는 자살의 가능성을 낮춘 다음에는 그 고통의 뿌리를 찾아서 치유해야 한다. 내담자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감정의 고통을 하나하나 꺼내서 살피고 보듬고 이해시켜야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한 감정의 심리학, 최기홍, 국수, 2024, 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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